“따닥따닥 판자집 짓고 살았는데, 첫 삽을 뜬 것이 영주동 재개발이야.”
□ 내가 말을 잘 못하는데...
■ 부담없이 말씀해주시면 돼요. 그냥 할아버지 살아오신 얘기. 영주동에서 언제부터 사셨어요?
□ 1958년도에 처음 발 디뎠어요. 58년도 군 입대해가지고, 당감동에 있는 부산 통신 기지창이라고 하는 곳에 배정을 받았는데 마침 우리 누나가 영주동에 살아가지고 누나 집에 처음 찾아간 것이 58년 12월 말경입니다. 군에서 주말마다 외출해서 갈 데가 없으니까 누나 집에 와 가지고...
그렇게 3년 못 되게 군복무를 마치고 시골 고향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에 가서 1년 반, 한 2년 농사를 짓고 있으니까 부산에 결혼 자리가 나타났어. 보니 처갓집이 영주동이라. 그래서 결혼하고 이제 정착을 한 곳이 영주동이야. 280번지인가... 하여튼 저쪽에, 음지쪽에 내가 정착을 하게 된 거야. 거기 한 6년 있었는데 겨울에 추워서 추위 견디기 참 힘들고 그랬어. 여기 산(박가이산¹) 양지편은 건너와보니 볕이 참 좋더라고.
■ 그래서 여기 영주아파트²로 이사오신 거에요?
□ 아니. 그때만 해도 여기는 개발이 안되니까 가내공업으로 마대 만들고 수집하고 하는 영세민들이, 또 부두에 노동 다니는 영세민들이 따닥따닥 판자집 짓고 살았는데. 부산시장 김현옥 다음에 김대만 시장이라고, 그분이 밀양분인가 하여튼 아주 틀이 좋고 아주 거창한 분이 부임해서 부산을 재개발해야 되겠다, 그래서 처음 삽을 뜬 것이 영주동 재개발이야. 판잣집들 철거하고 이제 아파트를 짓게 됐는데 이 아파트가 처음 지을 때 이름은 ‘68아파트’라고 했어. 68년도에 삽을 댔다 이거지. 그래 68아파트라 해가지고 첫 삽을 댔는데 그때는 아파트라는 개념이 없을 때야. 일제 때 혹 뭐 광복동이나 남포동에 한 채씩 있는 거 보기는 했지만은.
■ 처음엔 영주아파트를 68아파트라고 불렀구나.
□ 그래 부산시에서 주택사업소를 만들어갖고 거기서 공사 시작한 것이 68년도. 그때만 해도 지금같이 기계화가 안되니까 전부 인력으로 파고 기초공사하고 세멘트도 전부 인력으로 삽가지고 혼합해서 높인거라. 그때는 4층이라 하면 제법 높은 층수라 봤지. 한 1년 남짓해서, 69년도 말쯤 완공이 됐어.
내 기억엔 69년 말쯤 돼서 70년도 입주가 시작됐는데, 아파트는 다들 처음이고 독립가구라 집집마다 화장실도 있지, 이래 고급이다 보니 기관장들, 세관 사람이나 항만 사람이나 구청, 우체국, 역에 일하는 이런 사람들이 차지했어. 서민들은 들어오기 힘들었지. 나도 맨날 청약을 하려면 전부 청약이 다 되고 없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뭣이 이리 힘드노. 나는 매일 내려보면서 아파트가 올라가는 것도 보고 이제 신청하면 되겠다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 전에 정보를 아는 사람들이 먼저 다 청약을 해버려서 없어. 자리가 없어가지고 자주 왔다갔다 하면서 기다렸는데... 한 4, 5개월 지났지 아마. 그래 전세방이 하나 나오더라고, 여기 나동에 104호에.
■ 오, 영주아파트 옛날엔 인기 많았네요.
□ 응 바로 여기, 3블록 나동 104호에 전세방이. 거기에 내가 계약금을 걸고 전세로 들어왔어. 집주인이 누구냐면 어떤 계장인가 과장인가, 그분이 “여기 살고 싶으면 인수하라” 이래하데. 그래서 내가 인수를 했어, 60만원에. 70년도 한여름에 세 들어오고 나서 몇 개월 정도 지나고서. 그래서 오늘날까지 사는 거지. 아무 데도 안 가고.
■ 50년 넘게 한 자리에 계셨으니까 여기 모르는 게 없으시겠다, 그죠. 그럼 주위에 아파트는 이 영주아파트 하나였어요?
□ 그때만 해도 높은 데는 사람 인력으로 걸어 올라가야 되니까. 교통도 다니는 차도 별로 없었고. 처음에 산복도로 만들어가지고 버스가 다니기는 겨우 다녔는데 조금 지난 다음에, 한 2년 뒤인가 수정동 아파트 저게 들어서고. 보수 아파트, 수정 아파트도 이 아파트보다 한 2년 늦게 들어서 가지고 그때부터 이제 아파트 사업들을 한 거야. 그런데 그 아파트들은 우리 영주아파트보다도 좀 낙후된 아파트였어. 복도가 중간에 있고 양쪽 가세에 주택이 있어. 그리고 변소도 공동으로 돼 있어, 가보니까. 그러니까 좀 불편하지. 평수는 같은데. 그래서 계속 여기 정착했는데, 그때 인제 아파트가 차츰차츰 들어서는기라.
뭐 그로부터 서서히 아파트 문화가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70년대 중반, 후반 이렇게 가면서 쭉 아파트가 발전해나가기 시작하고. 아파트분양이 잘 되고 하니까 그 부산시 주택 영업소인가 그랬는데 사업소가 되어가지고, 독립회사가 돼서 지금은 부산도시개발공사가 됐지 아마. 사직동하고 부산 시내 온 데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는거지. 그때부터 일반 건축업자들도 아파트에 눈을 떠서 아파트를 짓기 시작한거라. 그게 아마 70년대 후반, 80년대부터 아파트로 주거문화가 변화되는거지.
■ 할아버지 말씀 너무 잘하시는데요? 방금 부산 아파트 역사가 쫙~
□ 그런데 민간아파트 딴 데 잘 분양이 되고 하니까, (돈) 있는 사람은 전부 딴 데로 나가는기라. 그래 나는 직장도 가깝고 하니까 여기서 나가지를 못했지. 내가 한 4,50년 경험을 해보니까 이 아파트는 계속 내려가고 딴 데 아파트는 분양만 받으면은 계속 올라가는 거라, 그거는 민간아파트니까… 내가 지나온 경과로는 그렇게 됐어.
딴 데 아파트 사 가지고 오르면 팔고, 오르면 팔고, 이래해서 돈 벌이는 사람들을 내가 더러 알거든. 근데 나는 여기 있으니까 생활이 점점 더 못해지는 거지. 그래서 '아 이래서 주택이나 토지에 손대는 사람이 돈을 자기 손으로 벌이는게 아니고 시세 차익으로 벌이는 수단이 됐구나.’ 싶어. 그래서 나는 지금 잘 살들 못해. 딴 데 이제 움직일 수가 없지.
■ 영주아파트는 50년이 넘었는데 다시 짓는다는 얘기는 없었어요?
□ 그렇지. 그 사이에 90년도쯤 되니까, 한 이십 몇 년 지났지. 그러니까 법이 또 그런 법이 나오더라고, 아파트 재건축사업이라는 게. 그게 나오니까 또 우리 아파트 해당이 되니까 내가 ‘이래가지고 안된다, 20년 넘었으니까 재건축을 해보자’ 하고, 영주아파트 880여 세대에 다섯 개 통이 돼있거든. 그 통장 다섯 사람을 같이 모아가지고 건축회사에 여기저기 가서 ‘우리 아파트를 재건축 해주시오’ 하고 부탁을, 견적을 내봤는기라.
근데 고때만 해도 재건축하는 게 그렇게 많이 활성화되지 않았거든. 우리 생각에는 아파트 지을 땅이 어디 자꾸 있겠나, 재건축만이 아파트를 늘릴 수 있는 수단 방편이 안되겠나 이랬는데 생각이 달라. 이 건축업자들은 여기저기 변두리에 헐은 땅 사가지고 아파트 쭉쭉 올려버리니까... 원도심 서구, 동구, 중구 이쪽은 요지다 보니까 그게 안 되더라고.
제일 번화가가 광복동, 남포동. 광복동은 패션의 첨단 1번가고, 유흥은 남포동. 딴 데는 뭐 볼 게 없었어. 서면도 지금은 교통은 요지가 됐지만은 볼 게 없었는데. 지금은 뭐 해운대나 저 반송 쪽으로 확장되고, 그런 추세가 있는 거를 우리는 잘 몰랐지.
■ 재건축도 추진해봤는데 잘 안 된거네요.
□ 내가 여기 못 떠나게 된 거는 가만히 보니 여기 직장, 그때만 해도 교통수단이 그렇게 없었고 하니까 직장 가까운데 주로 거주를 많이 했거든. 그러니까 부산 항만에서 일터를 잡고 있는 사람들한테 수정동, 초량, 영주동, 대청동 요 산복도로 주변 여기가 제일 좋은 자리였어. 그러니까 딴 데 다녀봐도 여기만한 데가 없어. 왜? 남향이지, 가깝지, 교통수단 좋지. 이래서 좋았는데.
■ 그러게요, 중심지니까 교통이 좋고 또 옛날부터 터널도 있었잖아요. 부산터널?
□ 내가 알기론 처음에 여기에 정착을 하니까 부산에 터널이 없었어. 그런데 터널이 없으니까 저 서구나 가려면 돌아가야 되는데 터널이 생긴거지. 마 그때만 해도 터널로 사람들이 막 지나다녔거든. 참 좋았어.
근데 한때는 먼지가… 그때만 해도 발전이 안되고 하니까 터널에 먼지가 빠져나가지를 못하는기라. 가는 차 오는 차 섞이니까 매연이 굉장히 많았어. 그 길이 사람들 통행로였는데 한때 매연 때문에 지나다니지를 못했어. 들어가면 매연이 콱 해가지고 앞이 잘 안 보이고 하니까 집진기를 시에서 해가지고 매연을 잡아내는 그런 장치를 했더라고. 들어가면 왱~하는 소리가 나고 이랬거든.
■ 또 옛날 기억나는 영주동 모습은요?
□ 요기 공동 수도가 하나 있었고, 저 우에 하나 있었고. 영주동에 수도가 한 서른 너댓 개밖에 없었어. 그래 모두 판자촌이니까 저 그...분뇨시설이 별 수가 없지. 재개발되고부터 분뇨차도 생기고, 전부 분뇨를 수거해가지고 어디 버렸느냐. 지금 보면 저기 디지털 고등학교 저 우에.
■ 그게 몇 년도에요?
□ 내가 69년도 그때부터 등산도 댕기고, 해군 전함이 있다고 해서 구경하러 올라가기도 하고. 올라가다 보면 마 아주 지저분하고 추잡었어. 그런 아주 열악한 도시를 김대만 시장이 이래가지고 안되겠다 싶어서 재개발한거지. 싹 없애버리고.
그때만 해도 분뇨고 뭐고 전부 집에서 해결해가지고 아주 열악했지 환경이, 이 지역이 전부 다 그랬어. 지금 보면 참 격세지감이지. 이렇게 발전할 수가 있나. 이거를 지금 사람은 이야기를 들어서 아는지 모르지만 경험 안 하고 눈으로 안 보면 아무도 모르잖아. 난 그걸 보고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꾸 의심을 가지지. 무슨 의심? 어떻게 급작시리 전부 지게지고 나무 해가지고 뗄감 떼 가지고 밥을 해먹고 농사짓고 이랬는데, 전부 등짐 지고 소로 실어나르고 이랬는데 지금은 참말로... 내가 살아온 80년이라 해도 그동안에 이렇게 발전할 수가 있나 세상이. 이게 내가 씁… 이상하다, 나는 지금 꿈을 꾸는가 싶은 생각도 있고. 젊은 애들이 이런 역사를 알아가지고 고마움을 알고, 조상들에 대해서 보답하는 뜻으로 훼손하지 않고 발전시키려고 해야 되는데…
■ 네, 말씀 잘 듣고 기억할게요. 그럼 영주동에서 제일 만족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 만족하는 게 지금 부산 그거 새로 하잖아, 항만 옮기고. 항만 옮기는 것도 내가 보면 참 잘하는 거거든.
■ 북항 개발 말씀하시는거죠? 음, 또 그러면 영주동에 자주 가시는 곳 있으세요?
□ 영주동은 좁으니까. 전에는 등산을 자주 하고 공원을 자주 갔는데 요즘에는 뭐… 그냥 몸이 좀 힘이 들고 그러니까 주변에서 가볍게 하지.
□ 영주동은 좁으니까. 전에는 등산을 자주 하고 공원을 자주 갔는데 요즘에는 뭐… 그냥 몸이 좀 힘이 들고 그러니까 주변에서 가볍게 하지.
■ 운동코스는 저기 민주공원?
□ 그렇지, 운동코스. 옛날에 대청공원으로 올라가서 대신공원이라고 만들었거든. 저 숲길을 달리기도하고 그 봉우리 정상으로 가가지고 저 끝이 구덕터널 위잖아, 그리 갔다 이리오는 게 보통 체력 아니면 못하는기라. 그때 내가 열심히 해놓으니까 기본이 조금 생겼는갑다, 이런 자부심도 있고 그래. 근데 지금은 그리 못하니까. 나이 먹는 거는 이길 수 있나.
■ 저는 처음에 영주동 와서 눈에 딱 띈 게 코모도 호텔요.
□ 70년도 초에 코모도 호텔 저거를 짓는다 이러면서, 처음에 34층으로 설계됐다고. 설계하고 뭐 야단법석, 처음에 고사도 지내고 하잖아. 우리가 떡도 얻어먹고 이랬거든.
내가 알기론 거기가 옛날 헌병대 자리라. 일제 때 헌병대하면 아주 무서운 기관이거든. 일본 헌병하면 겁이 나. 순사 칼 차고 뭐 우리는 어릴 때 다 경험했으니까. 헌병대 요 자리 참 좋다 했는데 고기에 34층이 올라간다 하니까 참 전망이 좋겠다 했는데.
몇 개월인가 고사지내고 얼마 안 가서 갑자기 표지판을 보니까 17층으로, 반으로 줄어뿟드라고. 왜 그런고 하니 세멘트 파동이 났어. 그래 건축이 아파트 건축도 일어나고 도로공사하고 뭐 이런 건축공사가 많으니까 그때만 해도 지금같이 배가 많았나, 많이 실어다 올 수도 없고 이러니까 세멘트가 없어서 건물 못 짓는다 이래 돼버렸어. 그래가지고 반으로 줄어든 기 지금 저 코모도라.
그때 참 저 34층 높이 올라가고, 1부두하고 케이블카 선을 놓기로 설계가 되어있더라고. 근데 반으로 줄으니까 그것도 없어져 버리고. 아주 명당이 됐다 했더니만 줄어들어 버렸어. 그때 했으면 여기서 영도까지도 케이블 놓을 수도 있고, 뭐 다양화 해가지고 관광지가 더 됐을 건데. 자꾸 엉뚱한 데 돈을 쓰는 것 같아서 좀 안타까운 면도 있더라고. 그래되면은 여기가 상당히 살기 좋은 원도심 된다, 이거라.
■ 지금도 명물이지만 처음대로 지었으면 더 멋있었겠네요. 할아버지, 통장님도 오래 하신 거죠?
□ 내가 뭐 아무것도 아닌데, 여기 아파트 오니 통장님이 한 분 있더라고. 이 사람이 이사를 가게 됐다고 내한테 이걸 하라 이거라.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할 수 없다, 이랬는데 동장이 찾아와서 사정을 하더라고. 그래서 75년도부터, 30년 가까이 통장을 했어.
이 블록에 처음에는 세대수가 192세대였지만은 두 칸짜리(두 집을 터서 합친 것)가 한 동에 거의 한 집씩 있었거든. 그러니까 그만큼 한 집에 두 세대 사는 사람도 있었고 내가 확인해봐도 그때 한 200세대가 살았어. 지금이야 반 조금 넘게 살고, 그만큼 줄어들어 버렸고.
그래 억지로 통장을, 그것도 하다 보니까 참 오래 했지. 동에서 다른 거 뭐 하라는 거는 내가 안 했어. 동회장 하라는 것도 안 했고 그다음에 상장 준다는 거도 안 하고 이랬어.
■ 오로지 봉사 정신으로? 영주동에서 권력을 누리실 수도 있었는데.(웃음)
□ 그때는 65세가 정년이었어, 지금은 70살까지 하는데. 내 처음 시작할 때는 한 달에 7,000원인가 통장 수당 받았는데 얼마 안 가서 12,000원으로 올랐더라고. 자꾸 오르더니만 12만원까지 올랐어.
근데 예전에는 선거하면서 통장을 ‘저거 공화당이다, 밀어내야 돼 죽일 놈이다’ 하고 야당에서, 김대중당에서 마구 그랬어. 통장 놈을 다 죽여야 민주화가 된다, 이런 소리도 나오고 이랬거든. 물론 나쁜 점도 있었지. 통장이 정부조직화가 돼 가지고... 그렇지만 어차피 이 세상이 조직화가 돼야 하는 거 아니가. 그래서 내가 가만히 볼 때 통장이 그래도 나쁜 그거는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 그런데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통장 없앤다 해놓고 대통령 되고 통장 월급을 배로 올려줬어, 배로. 30만원으로 올렸어.
■ 통장 오래 하시고 나서, 지금은 아파트 청소 매일 하시던데. 여기 청소는 어떻게 하시게 된 거에요?
□ 동네 청소를 누가 하노! 나는 통장하다 보니까 내가 이 동네 심부름꾼이다~ 이런 못이 박혔거든.
더 발전이 되고 보기 좋게 할라 하면 청소를 해야 안되나. 이 아파트 관리자가 아무도 없거든. 자칭 내가 관리자가 돼 가지고 혼자 하는 거지. 그러니까 옳은 사회가 될라 하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청소도 일종의 지역봉사 아니가. 내 마음이 그기 아니면은(봉사할 마음이 아니면) 저래 못하지. 돈 어마하게 준다 해도 못하는 사람은 못한다. 나는 습관화가 돼 가지고 저렇게 쓰레기 있으면 분리해서 다 정리하지. 속으로는 상당히 자부심을 가지지만은 더럽지. 집에 가면 맨날 손 씻는 게 일이지
■ 마을을 위해 지금도 봉사하시고 계시네요.
□ 그렇지. 그렇지만은 남이 알아주라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알아주는 거는 안 알아줘도 욕이나 하지 마라, 밥그릇은 깨지 마라. (웃음)
■ 사람들이 감사하다고는 해요? 왔다갔다 하면서
□ 그런 사람은 더러 있지. 혹 들으면 아이고 뭐 도로 내가 미안하지, 고맙다 하지.
살다 보니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이 많아가 추억에 살아야 되는데 추억을 생각하면 한없지만은 그러니까 아 인생은 이런 거구나,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거 그저 나한테 충실하고 뭐 남길 게 있으면 좋은데.
그, 부자들 갑부들 사는 거 보라고. 얼마나 안타깝노. 고맙기도 하고 그 사람들. 정주영씨가 안 죽었으면 대통령 됐으면, 우리 아파트 근사하게 현대 아파트로 지어주겠다 약속을 했거든. 우리 아파트를 봐가지고 해야 되겠다, 내가 책임자니까 그랬거든. 그때 기회를 잡았어야 하는데.
■ 할아버지, 사진을 어제 올라가시던 계단 있죠. 거기서 찍을까요? 영주아파트 앞에서? 이쁠 것 같은데 오늘 날도 좋아가지구. 가볼까요?
□ 나 이거 나오는거를 좋아하지를 않거든.
■ 왜 오늘 이쁜 옷 입고 오셨는데. 사진 찍으러 가봅시다. (이동하면서) 여기서 항상 청소하시면 주민분들 많이 마주치겠어요 그쵸?
□ 그렇지! 보면 늘 뭐 아는 사람. 거의 다 알지. 오래 살았으니까. 그러나 여기도 많이 바뀌었잖아. 옛날 사람들 별로 없어. 한 몇 십 분의 일정도. 옛날 사람... 별로 없어.
□ 그렇지! 보면 늘 뭐 아는 사람. 거의 다 알지. 오래 살았으니까. 그러나 여기도 많이 바뀌었잖아. 옛날 사람들 별로 없어. 한 몇 십 분의 일정도. 옛날 사람... 별로 없어.
■ 할아버지가 이렇게 다 정리해 놓으신 거에요?
□ 정리가 뭐야. 다 흐트러지고 해가지고 보기 싫은데 지금.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생각을 지금 하구마. 자꾸 버리고 해도 또 생기고, 또 생기고.
■ 그래도 청소를 해주시니까. 청소라도 안 하면 저기 엄청 더러워졌을 것 같더라고요.
□ 옛날에는 아파트 안에 입구에 보면 문이 있는데 그 안이 쓰레기 버리는 데라. 엄청난 쓰레기가 요 안에 다 들어가니까. 그 문 옆에 집이 내 집이었는데, 구청에서 차 요 대놓고 그 쓰레기를 지고 차에 붓고 이랬거든. 그래 쓰레기 버리는 날만 되면 냄새가 나서 집 안에 있지를 못해. 그때만 해도 이거는 집이 아니랬어. 왜, 쓰레기통이 달려있는 집은 집이 아니랬어. 싫지만은 참고 몇 십년을 살았어. 그 뒤로 지금 집으로 이사했어. 옛날에는 쓰레기차가 와 가지고 종 두드리고 할 때 동네 사람들 쭉 줄 서 나와서 버리고 이랬잖아.
■ 진짜요?
□ 그렇지. 그래 했지. 지금같이 이래 안 했지. 종량제로 바뀌고, 이것도 많이 변했어. 자꾸 좋아지는 것이 그게 세상인기라. 그러니까 내가 걱정하는 것도 쓸데없는 걱정이라. 자꾸 좋아져야지 나빠지는 일이 있나.
■ 그러면 여기 입구에서 한번. 할아버지 전신 한번 찍을게요. 할아버지 옛날에 사시던 곳이니까. 여기 길이 너무 이뻐서. 할아버지 옛날에 사시던 곳이니까.
□ 아니 이쁘지 않은데, 순 엉터리. 믿을만한 소리가 돼야 믿지.(웃음) 참, 오래 사니까...
■ (웃음)오래 사니까 별일이죠. 더 오래 사셔야죠.
□ 아이고. 그거는 다 정해져 있는기고...
■ 할아버지 책 혹시 몇 권 필요하세요?
□ 책 많이 필요도 없어. 주면 좋고 뭐 안 줘도 좋고, 해주면 고맙고.
1. 박가이산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를 한문으로 쓰면 ‘박간방태랑’이 되고 이를 우리말로 부른 것이 ‘박가이’이다. 그는 개항 직후인 1880년 우리나라에 건너와 굴지의 부동산업자가 된 인물로서 부산·경남에서 그의 땅을 부쳐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어디든 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주동의 ‘박가이산’이라고 불리는 땅으로, 현재 영주배수지가 있는 곳이다.
‘하자마 후사타로’(迫間房太郞)를 한문으로 쓰면 ‘박간방태랑’이 되고 이를 우리말로 부른 것이 ‘박가이’이다. 그는 개항 직후인 1880년 우리나라에 건너와 굴지의 부동산업자가 된 인물로서 부산·경남에서 그의 땅을 부쳐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어디든 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주동의 ‘박가이산’이라고 불리는 땅으로, 현재 영주배수지가 있는 곳이다.
2. 영주아파트
해방 후 박가이산을 비롯한 부산의 원도심 구릉지 일대에는 한국전쟁 피란민이 대규모로 이주 정착하며 무허가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부산시는 도시 정비를 목적으로 ‘고지대 재개발 계획’을 세우고 그 시범지구로서 영주동의 판자촌을 철거한 뒤, 처음으로 대규모 시영아파트를 짓게 된다. 1968년 37개동 888세대로 지어진 영주아파트는 1990년대 일부가 재건축되고 현재 10개 동이 남아있으며 8개 동은 영주동 도시재생뉴딜사업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해방 후 박가이산을 비롯한 부산의 원도심 구릉지 일대에는 한국전쟁 피란민이 대규모로 이주 정착하며 무허가 판자촌이 형성되었다. 부산시는 도시 정비를 목적으로 ‘고지대 재개발 계획’을 세우고 그 시범지구로서 영주동의 판자촌을 철거한 뒤, 처음으로 대규모 시영아파트를 짓게 된다. 1968년 37개동 888세대로 지어진 영주아파트는 1990년대 일부가 재건축되고 현재 10개 동이 남아있으며 8개 동은 영주동 도시재생뉴딜사업 구역에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