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영주동 왜 이리 못 잊는지 내도 모르겠다. 너무 좋아, 내가 여기 살기가.”
■ 할머니 영주동에서 언제부터 사셨는지?
□ 영주동에서 한 60년대, 24살부터 요 살았그든. 저 위에 산복도로에 박정희 대통령 있을 적에.
■ 영주동에 사신지 오래되셨네요.
□ 오래됐지. 딴 데로 이사가라 하는데 안 가고 그래서 인제 여기로 들어온거라.
■ 그러면 계속 영주동에 머무는 이유는 뭐에요?
□ 우리 교회가 있거든, 모자이크 교회. 그 교회 떠나기 싫어서. 나는 영주동만 돌고 있는거라. 집도 다 팔아먹고, 달세로.
■ 영주동에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 말도 몬하지 그거는! 우리 아파트, 저 시민아파트¹ 지을 적에 일했그든. 일 안핸게 없어 내가. 배 일도 많이 했고 일 안 핸 게 없어.
■ 배 일이면 저기 영도에서 하셨어요?
□ 응. 영도에서. 기름배, 그 일 많이 했어. 기름배 청소하는 거. 그리고 또 우리가 집 짓는 데 일을 많이 했거든. 회사도 댕기고 고생고생 말도 몬 해. 우리 손자 인자 30살이가, 그걸 갖다가 키운다고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저거를 회사 업고 다니면서.
■ 어휴, 애 많이 쓰셨네요. 할머니, 영주동에서는 자주 가시는 데가 있어요? 산책하는 곳이나?
□ 전에는 저기 복지관 공부하러 다녔지.
■ 어떤 공부요?
□ 한글공부. 한글공부 6년 배웠거든.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못 가고 있는기라. 안 그러면 끝까지 다니는데. 그 봐봐.(액자를 가리키며)
■ 아, 그럼 이거 할머니 글씨에요?
□ 응. 내가 일기 써가지고 해놓은거라. 요새는 또 미술. 내가 보여줄게.(가방에서 미술 색칠 꺼냄) 미술하러 댕겼는데 코로나 때문에 또 못 간거라. 못 가고 선생님이 한 달에 한 번씩 갖다줘.
■ 할머니 사진 좀 찍어 갈게요.(웃음) 이거 책 하나씩 갖다주는 거에요?
□ 응응. 책 하나씩 갖다주는데 나는 잘한다고 두 권씩 갖다주네.(웃음)
■ 이쁘다~ 색연필로 색칠하는 거에요? 하나하나?
□ 응. 색연필도 다 갖다주거든, 천주교 신부가. 복지관에서 와서 주는 거지. 이것도 5년하고 나니까 마...
■ 우와 5년이나 했어요? 할머니 산책은 자주 하세요? 운동 좋아하세요?
□ 운동 좋아하지. 아까도 저거 박스 갖다주고 왔거든, 리어카 싣고. 그거 하면 땀을 팍팍 흘리기 때문에 따로 운동하러 안 가 나는.
■ 아, 그럼 할머니 운동도 되고 소일거리도 되고.
□ 하모하모, 건강하고.
■ 매일매일 하세요?
□ 할 때 있고 안 할 때 있고.
■ 영주동 한 바퀴 돌면서 박스 하나씩 주우시는 거죠?
□ 하모. 또 모아주는 사람도 있고 하니까.
■ 보통 몇 시간 걸려요? 이렇게 한 바퀴 도시는데?
□ 한 두 시간? 네 시간?
■ 와 할머니 체력이. 건강하신데요?
□ 내년이면 팔십이다 인자.
■ 완전 건강하신데요? 할머니, 그러면 영주동에서 외지인들한테 추천할 만한 공간? 여기는 가봤으면 좋겠다 하는 곳 있어요?
□ 가봤으면 좋겠다? 저 우에 저기 민주공원. 근처 살 적에는 맨날 다녔는데 이제는 안 올라가진다.
■ 영주동에 살면서 제일 기억나는 거는요?
□ 기억나는 거... 내나 다 좋지 뭐. 저 우에(산 위 시민아파트) 살 적에는 농사도 다 지어먹고 했는데.
■ 그러면 할머니, 앞으로도 영주동에 계속 사실 거에요?
□ 하모 앞으로도 나는. 우리 딸아가 오라고 난리, 아우 난 안 간다. 나는 여기 살 거다. 친구들도 많고. 전부 다 교인 친구들.
■ 교회 다니신 지는 오래됐어요?
□ 응, 오래됐어. 한 50년 됐어.
■ 영주동은 어느 계절이 제일 이뻐요?
□ 9월! 9월하고 꽃피고 할 때 3월 달 제일 좋지.
■ 꽃 보기가 어디가 좋아요?
□ 대청공원, 옛날 이름은 대청공원이거든. 요새는 민주공원이라 하는데.
■ 9월에도 영주동이 좋다고 하셨잖아요. 낙엽보기는 어디가 좋아요?
□ 그렇지. 9월에도 영주동이 좋지. 내나 민주공원 그 가면 낙엽도 있고 오만 거 다 있지. 옛날에는 그 앞에서 장사를 많이 했는데 먹는 장사도 하고.
■ 직접 농사한 것도 팔고 그랬어요? 할머니도 파셨어요?
□ 아니 난 팔진 않았어. 인자 다 치웠어. 참 많았어 진짜, 요새는 사람들 많이 없다 카더라.
■ 영주동에 잘사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던데?
□ 잘사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못사는 사람들은 못 살고 그랬어.
■ 6.25때도 영주동에 계셨어요? 여기 주위로 피난민들이 많이 오지 않았어요?
□ 여기 피난민들 많이 왔다하대. 딴 데는 다 난리가 났는데 부산만 난리가 안 났어. 저 함안으로 진주로 전부 난리가 났는데 부산만 난리가 안 난거라.
■ 할머니는 그때 뭐하고 계셨어요?
□ 그때는 어렸지 뭐. 함안 군북(면)에 있었지. 우리 친정 고모가 거기 살았거든.
■ 그러면 어떻게 영주동에 오게 되신 거에요?
□ 아이고 25살 때, 우리가 돈 10만원 가지고 있었나... 저기서 우째 사람이 사는가 싶어서 가 봤드만, 그래 그 위에 올라가서 하나 사가지고 살았어. 보니 전부 피란민들이라, 하꼬방에 천막 쳐가지고 전부 얻어먹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두 식구가 보리 한 되 팔아가지고 이틀 먹고 살았어. 그리고 국제시장가서 건빵을 사가지고, 그것 가지고 그렇게 살았다.
■ 힘들지 않으셨어요?
□ 엉망진창, 그때는 진짜 엉망진창이었어. 얼마나 좋은 세상이고.
■ 언제부터 영주동이 안정화되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좀 갖춰졌잖아요.
□ 우리 교회가 하꼬방 교회거든. 열 사람 예배 봤어. 한 30살 되니까 여기가 자꾸 발전이 되데? 그러니까 나가라 해서(철거로 인해) 전부 다 나갔는데, 용호동 추첨이 걸렸어. 그런데 거기서 살라고 하니까 너무 못 살겠어서 다시 영주동으로 왔는거라. 이 영주동에 왜 자꾸 왔는가 몰라 내가.(웃음) 그래가지고 영주동 하꼬방 하나 다시 사서 살다가 거기가 또 철거가 되는 거라. 와 사람 미치겠데. 두 번째 철거가 돼서 저 절 밑에 천막을 쳐서 거기서 한 일 년 살았나? 이제 추첨하라하데. 근데 또 개금이 걸렸는거라. 개금에 좋은 데 걸렸는데 또 팔아버리고 영주동으로 왔어. 영주동 와서 또 셋방살이 했어. 어휴 징그러워.
■ 영주동 살다가 용호동 가서 살고, 다시 영주동 왔다 또 개금 가고, 또…
□ 그래, 우리 애가 그런다. 엄마는 영주동 왜 그리 못 잊노. 그래 나 영주동 왜 이리 못잊는지 내도 모르겠다. 너무 좋아, 내가 여기 살기가. 저 우에 올라가가꼬 아파트 있거든, 저 우에 시민아파트. 거기 2호동 그서 살았는기라.
■ 아, 시민아파트 사셨어요?
□ 하모. 시민아파트 그서 살았어. 그서 살다가 철거 또 되는 바람에 그래 인자, 이 밑에 내려왔다 아이가.
■ 그럼 할머니 내려온 지 얼마 안 됐겠네요?
□ 응응. 그래도 야 5년? 6년 돼간다. 내려온 지가.
■ 안 그래도 저희 가봤거든요. 철거 들어간다고 기록하고 있거든요. 저기도 엄청 높잖아요. 어떻게 왔다갔다 하셨어요? 너무 높던데
□ 그래도 그기서 몇년을 살고.
■ 몇 년 사셨어요?
□ 모르겠다. 몇 년 살았는데. 오래 살았어. 일하고 저녁으로 이백 가이당 타고 내려가고 이백 가이당 타고 올라가고 그랬어.
■ 이백 가이당?
□ 여기 초원아파트 글로 하면 쭉 이백 가이당이거든? 가이당이. 그 가이당 타고 다녔어.
■ 가이당이 뭐에요? 모노레일?
□ 모노레일 말고.
■ 자전거?
□ 아니 높은데 올라가면 한가이당 두가이당 세가이당 해서 안 올라가? 그기 가이당 아이가.
■ 계단 올라다녔다고? 하하하 그걸 가이당이라 그래요?
□ 응응. 그 가이당. 계단은 새로 놓은 걸 계단이라하고 우리는 가이당이라 카거든. 가이당타고 올라간다고. 내가 아이고 저기를 우째 댕겼는고 싶고 그래.
■ 우리는 생각도 못할 것 같은데. 그러면 할머니 영주동에서 더 하고 싶으신 거는 없으세요?
□ 하고 싶은 거 뭐 있노. 내나 뭐 리어카 끌고 다니다가 가면 되지.
■ 딱 리어카가 할머니 친구네요.
□ 친구라, 그래. 한 3년 했거든. 몸에도 좋고. 참 좋아. 살도 빠지고.(웃음) 참 좋아.
■ 그럼 저거 끌고 다니면 동네에서 할머니 모르는 분이 없겠다.
□ 그렇지. 내 모르는 사람이 없어. ‘좀 밀어줄게요’, 하면 ‘아이구 난 됐소. 난 내 혼자 갑니다’ 하고 그래. 되게 힘들면 좀 밀어줘라 카고.
■ 할머니 저희 나가서 사진찍을까요?
□ 그럼 내 옷을 입어야지. 이래가 안 된다.
1. 시민아파트
영주아파트가 첫 대규모 시영아파트로 지어지고 나서 부산시는 ‘주택사업건설사업소’를 설치하고 시영아파트 건설을 본격화한다. 시민아파트는 그중 하나로, 영주아파트보다 더 고지대(해발고도 100m 이상)에 4층짜리 4개 동으로 1970년 준공되었다. 철거 후 공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50년이 지난 현재는 공공재건축이 진행중이다.
영주아파트가 첫 대규모 시영아파트로 지어지고 나서 부산시는 ‘주택사업건설사업소’를 설치하고 시영아파트 건설을 본격화한다. 시민아파트는 그중 하나로, 영주아파트보다 더 고지대(해발고도 100m 이상)에 4층짜리 4개 동으로 1970년 준공되었다. 철거 후 공원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50년이 지난 현재는 공공재건축이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