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게 불이 없으면 사람들이 허전하다던데요? 이 거리에 불침번입니다, 제가.”​​​​​​​
■ Editor  □ 과일가게 할머니
■ 쌤들한테 여기 소문 들었어요. 과일 엄청 맛있다고. 저희 주제가 영주동이거든요. 그래서 영주동에 언제부터 사셨는지, 어떻게 오셨는지 듣고 싶어요.


□ 우리가 애초부터 좀 못사는 집이었어. 초량 3동에서 굉장히 오래 살았는데, 우리 어머니가 여기 물건을 대줬거든요. 그래서 장사가 잘된다는 걸 알고 우리가 오게 됐어요. 그래서 엄마랑 나랑 같이 이 자리에서 30년 넘었어.


■ 30년 쭉, 시작하실 때부터 여기서 과일 파신 거에요?


□ 네, 우리는 과일만 했어요. 수박 같은 거를 소비자들은 겉만 보고 잘 모르는데... 그 시절에는 요새처럼 물건이 완벽하게 잘 나오는 때가 아니었거든요. 
요새는 다 과학적으로 언제 씨를 뿌려서 언제 수확을 하면 백 프로 익는다는, 그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큰소리치면서 장사하는데 그때는 마 그런 과학적인 것도 없고 대충대충하는데도 우리 어머니가 너무나 잘 알아가지고... 어떤 손님이 그랬어. 한여름에 열 번 수박을 사갔는데 한 번도 실수를 안 했다, 그만큼 어머니가 물건을 잘 보셨어요. 
그러고 옛날에는 저 위에 사람들도 이 시장을 많이 보러 오셨어요. 그래서 여름에는 수박 한 구루마 가져와도 나쁜 거 한두 개만 남고 다 팔고 장사가 좀 됐어. 그래가지고 이제 무에서 유를 창출한 거죠. 그래서 하찮은 일을 해도 한 자리에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IMF때도 뭐 걱정 안 하고 살았고요. 내가 벌어서 내가 자립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 그러면 계속 단골분들이 유지가 된다는 거네요? 


□ 우리 동네에서는 물어보면 아시겠지만 제일 맛있다, 그러고 마 평균적으로 믿을 만하고 맛있다! 또 제가 지금은 하도 무거운 거를 많이 들다보니까 다리가 아파서 배달이 안 돼서 특히 멀리서 차를 가지고 오시는 손님에게는 싸게! 여쭤보면 알아. 우리 동네 손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시는 손님은 싸게. 주부들도 캐리어를 들고 오시면은 배달비 포함 안 되게 싸게. 그래가 이때까지 유지하고 있어.


■ 다 장사 비법이 있었네요. (웃음) 다 말씀해주셔도 돼요? 


□ 배달이 안되니까. (웃음)

■ 그러면 이전에는 배달하셨던 거에요?

□ 옛날에는 배달도 좀 했죠. 그때는 심지어 지게를 가지고 짐을 날라주는 할아버지들이 계셨어요. 영주 2동은 특히나 계단이 많고 높잖아. 지금은 세월이 달라졌죠. 대형마트들이 생기고 나니까 게임이 안 되잖아요. 아무리 정직하게 해도 그 사람들은 양을 단체로 많이 구입하니까 단가를 싸게 들여오고 우리는 조금씩 하니까 경쟁력은 없는 거고. 
근데 이런 거 있어요. 만일 내가 논다면, 노년에 손을 떼고 논다면 무엇을 하고 살 것이냐 하는 약간의 두려움도 있어요.
■ 계속 영주동에서 과일 장사를 하실 생각이신 거네요?


□ 저는 이제는 다리 수술이 들어가야 돼. 이 수술이 너무 늦게 해도 결과가 안 좋기 때문에 내년에는 다리수술을 하고. 만일 잘되면 또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약간의 두려움이 있어요. 논다는 것에 대해서. 


■ 동네 주민분들이 엄청 아쉬워할 것 같은데요.


□ 모르죠. 요새는 뭐 좋은 거 파는 데도 많고 하니까.


■ 과일 가게는 몇 시에 오픈하는 거에요? 


□ 옛날에는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했거든요. 그렇지만 지금은 영감님이 아직 직장을 나가세요. 우리 워낙 부지런히 산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회사에 갔다오시면 저녁을 해드려야 되기 때문에 7시 되면 마칩니다. 늦게까지는 안하고. 요새는 늦게 사러오시는 손님도 없어요. 뭐 길에 사람이... 대한민국 사람들은 국가 시책에 정말 호응을 잘한다, 어쩜 이렇게 안 다닐 수가 있나 할 정도로 별 볼일이 없으면 안 다니세요. 그리고 우리 동네는 특히 연세 많은 분들이 많으셔. 그러니까 그런 분들도 안 오시고. 그냥 그냥, 하던 거라서 하고 있습니다.
■ 오다가다 영주동 주민분들도 자주 보겠네요? 저기 앞에 앉아서 사람 지나가는 거.


□ 그럼요! 대부분 다! 아는 분이죠. 옛날에 우리 아들하고 안경을 맞추러 가는데 내가 계속 아는 사람 만나면 인사를 하니까, 항상 인사로 먹고 사는 거거든요. 아들이 ‘와, 우리 엄마 구의원 출마해도 되겠네. 왜 그리 아는 사람이 많느냐’ 해서 웃었잖아요. 그만큼 대부분 다 아는 분이야. 
그리고 나의 수익을 위해서 조금 싼 거를 손님들한테 속여가면서 팔고 그런 거를 내가 좋아 안합니다. 물건 사러가면은 어쩌든지 좋은 거를 사기 위해서 요 집 물건이 좋다 거래하다가, 저 집 물건이 새로 나와서 더 좋다 하면 저는 미련없이 그 집으로 갑니다. 그래야만이, 내가 만족하는 물건을 갖다놔야만이 손님들도 만족한다~ 그런 기초 철학은 가지고 합니다. 
우리 아들이 서울대에 한꺼번에 둘이 들어갔거든예. 그래가지고 작은아들은 미국에, 본래는 공대에 갔는데 지금 미국에서 변호사에요. 무슨 일을 하느냐. 삼성, 엘지 이런 특허 계통에 우리나라 기업들이 외국이랑 재판 붙고 하잖아요. 그러면 그거를 방어하는 일을 우리 아들이 하고 있어요. 나는 그런다. 너는 내 가슴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다. 고생은 무척 하고 살았지만 그나마 자식이 자기 맡은 일을 다 하니까 저는 그 보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 와~ 남부럽지 않게 사시는 것 같은데요?


□ 모든 것이 열심히 하면 그게 착착착착 쌓여서 뭔가 결과물이 있다, 그런 것도 있죠.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도 표정에 보면 간혹 있지만 나름대로 이 영감 할머니는 열심히 살았어. 뭐 이거를 해서 재벌이 되겠습니까, 뭘 하겠습니까. 남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살고 꾸준히 힘든 일이나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하고 살면 그 끝은 분명히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감동이에요.


□ 예를 들면, 길에 청소를 한다고 해도 나는 그런 분들에게 “아유 수고하십니다” 격려해주고. 어린이들 학교 갔다가 오면 “아유 마스크 잘 써서 이쁘다” 격려해주고.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봐야겠죠?


■ 어유 당연하죠.


□ 고생은 뭐 무지무지하게 많이 했지만. 근데도 은퇴면 은퇴라 할까, 이거 접는 거를 굉장히 불안감을 가지고 나는 뭘 하고 살지? 뭐 모임 같은 것도 하나도 없고 어느 단체에 가서 배운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게 약간 두려움이 있어요. 
왜 시장에 가면 80도 훨씬 넘은 할머니들이 콩나물을 판다든지, 파를 까서 판다든지 그게 자기 직업을 못 버리는 거라. 저도 그런 마음이 있어요. (웃음)


■ 여기가 약간 문지기 같은 느낌이잖아요. 왜냐하면 여기 올라가는 초입에 딱 있다 보니까. 저기 삼거리, 사거리에. 


□ 여기는 터널에서 지나가는 데가 돼 가지고 너무나 매연이 많고 사실은 환경은 열악한 편이죠. 그래도 사람이 산다는 게 뭐, 시골 같은 그런 환경 좋은 곳에서 사는 거하고는 비교가 안되고.


■ 영주동에서 자주 가는 곳은 있으세요? 일하시면서?


□ 아무 데도 안 가는데요. 여기만 이렇게 뱅뱅뱅뱅하고 도매시장만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부산에서 조금만 떨어진 안 가본 동네에 갖다 놓으면 내가 집을 찾을라나, 그래요. 별로 다녀보지도 안 했고. 


■ 딱 진짜 여기 공간에서만 몇십 년 생활하신 거에요?


□ 네. 여기서만 주로. 그리고 일 년에 문 닫는 날이 하루 이틀 정도뿐이니까.


■ 아, 진짜요?


□ 네. 토요일 일요일도 하죠. 명절에도 옛날에는 했는데 이제 추석, 설은 놀아요. 왜냐하면 손님들이 없기 때문에. 영하 막 십몇 도 내려가면 그때 하루 놀고는 노는 날은 없어요. 


■ 와 진짜 부지런하게...


□ 또 장사라는 건 한 번 문을 열면 꾸준히 열어야 해. 그 이유가~ 
우리 부모님 고향이 황해도 해주인데, 이제 공산당이 나가라 해서 오셨는데 저기 위에 사람들이 공부를 가르치려는 의욕은 많아요. 그래서 우리도 그때 너무나 못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는 다 나오고 우리 막내는 전문학교 나왔는데 우리는 그것보다 더 잘 시켜야 안되겠습니까. 그래서 열심히 했지.
■ 그러면 고향은 어디세요?


□ 우리는 태어나기는 초량이 고향이고 부모님 고향이 그기지. 그러고는 영주동에서 계속 살았는데 뭐 여기 이 자리에 불침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옛날에는 아침에 여섯 시, 일곱 시에 나와서 밤 열한 시, 열두 시까지 계속 이 길에 서 있었어. 


■ 출근하는 사람, 퇴근하는 사람 다 보겠네요?


□ 다 보고. 졸음이 와도 서서 졸고. 그럴 정도로 정말로, 이 거리에 불침번입니다 제가. 


■ 거리를 밝히는 데 한몫하셨겠는데요?


□ 예. 근데 우리 불이 없으면 사람들이 허전하다던데요? 저 밖에 불 켜놔야 좋지, 올라올 때 깜깜하면 안 좋다 하시더라고.


■ 거리의 불침번, 아 진짜 그런 것 같아요. 퇴근하면서 과일사는 사람들이 많죠?


□ 옛날에는 많았어요. 왜냐하면 약주 잡수고 집에 가기가 미안하니까.(웃음)


■ 아 맞네!


□ 아유, 저 사람 집에까지 저걸 들고 가겠나 할 정도로.(웃음) 달라니까 안 팔 수는 없고 길을 이렇게 한참 지켜보고 그랬는데. 요새는 그런 거 없어요. 특히 코로나 시대에는 뭐 전부 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시고.


■ 하긴 거리에 왔다 갔다 출퇴근하는 사람도 많이 줄긴 했겠네요, 그죠.


□ 그때는 매출이 하루에 오십 만원 정도 됐거든요. 근데 지금은 뭐 십 만원 이십 만원...그러니까 얼마나... 요새는 마트가 많잖아요. 거기는 다 있으니까 한곳에서 일괄 구입하지, 카드로 결제하지, 할부도 해주지 우리는 뭐 게임이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졸업할 때 됐잖아.(웃음)
졸업하는 거는 다리만 안 아프면 나는 팔십까지는 하고 싶어. 왜냐하면 여기 있다 보면 동네 분들도 놀러 오고 이야기하고. 그분들도 심심해서 오고 나도 오면 반갑다고 과일도 못난이 있으면 깎아서 먹기도 하고, 여기가 놀이터라. 그런데 이 다리가 너무 아파가지고. 안 그러면 난 팔십도 졸업 안 할 거에요. 


■ 동네 분들은 얘기하러 요즘도 자주 오세요?


□ 많이 오시지. 하루에 두 세분은 꼭 오셔. 그래서 여기서 칼국수도 한 그릇 사 먹을 때도 있고. 또 여기 과일이 많으니까 뭐 잡술랍니까 해서 깎아서 먹기도 하고.
■ 놀이터네요, 진짜. 그 분들도 아쉬워하겠다.


□ 아쉽지만 그래도 좋은 말씀들 해주세요. 한 해라도 빨리 다리를 고쳐라, 장사를 하고 싶으면 그때 해도 된다고 좋은 말만 해주세요. 또 어른들은 삶의 지혜가 있고. 할머니라고 해서 다 깡그리 무시할 게 아니고 그분들도 자기네들의 생활, 역사, 전통 다 있잖아.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들을 것도 많고. 
또 치매가 온 어르신들은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 주시니까 나는 그 스토리를 다 외워.(웃음) 그래서 할머니가 뭐를 모르면 내가 딱 말해줘. 할머니 어디어디 가서 살았지 않습니까, 심지어 나이까지도 내가 다 말해주는데 그것도 좋은 일이야. 그 할머니 역시 집에만 있으면 더 심해지거든. 근데 나한테 와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그러면 그중에 이제 좋은 이야기도 있고 그분도 내가 자꾸 이야기를 들어주니까 좋다는 거라. 
어제 심지어 상추가 있는데 자기가 모르고 또 사왔다는거라. 그래가지고 나를 얼른 한 봉다리를 갖다주는 거라. 그래가 어머니 단감 두 개 가져가세요~ 했다. 그런 에피소드도 있어. 
뭐가 먹을 것도 많이 들어와. 그러면 또 여기 어려운 사람도 있거든. 우리는 많이 먹으면 지금 안 돼. 그래서 그분들 주기도 하고 도움도 받기도 하고 이야기도 오고가고 마, 나름대로 재밌는데 정말 섭섭해요. 


■ 그렇겠다, 다리 빨리 잘 고치시고 다시 오셔야겠네요. 


□ 예. 그래서 나 지금 지팡이 짚고 다닌다? 저 밖에 있다. 나는 남 부끄러운 거 그런 거 없어. 그걸 짚으니까 영 걷기 수월하고 좋아. 남이야 뭐 나를 흉을 보든지 말든지. 나는 그런 거는 별로 신경 안 써. 내 멋대로, 내 멋대로 사는거야. 


■ 내후년에는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 다리가 수술이 잘 돼 가지고 건강하다면 또 할 수도 있겠지. 심심하면은.


■ 수술이 잘 돼야 될텐데, 그러면은 이 사진이 올해 마지막 사진이 될 수도 있겠네요. 
잘 찍어드려야 되는데, 그죠? 올해의 사진을 제가 이쁘게 찍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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