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EE 김지현
EDITOR 안호균
처음 구상한 코스와 지금의 코스 사이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원래 유적지를 중심으로 코스를 짰어요. 시골이다 보니 오래된 재실이나 방치된 유적들을 자전거 타고 지나치면서 자주 보게 됐는데, 그 공간들에 아무런 설명이나 정보가 없더라고요. 세월이 지나 잊힌 곳의 이름과 의미를 되찾아주고 싶었어요. 저 스스로가 그런 공간에 대한 호기심이 크기도 했고요. 그게 첫 구상의 시작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조사하고 다녀보니, 유적지라는 카테고리가 생각보다 너무 넓더라고요. 그래서 컨셉을 좀 더 좁히고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고, 러닝 코스로 전환해봤어요. ​​​​​​​
그런데 그것도 준비하다가 문득, '나는 사실 달리기보다 산책을 훨씬 좋아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평소에도 산책을 정말 많이 하거든요. 뚜벅이 여행자이기도 하고, 갔던 길보다는 늘 새로운 길을 더 좋아해요. 가까이 있는 걸 두고 약간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서 결국 최종 주제는 산책이 되었어요. 이 작업을 하면서 배운 건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글의 주제가 명확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그리고 주제가 너무 넓으면, 핵심을 뾰족하게 잡기가 어렵다는 것도요.​​​​​​​
어떤 주제를 다뤄야 가장 흥미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는, 결국 내가 좋아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더라고요. 그리고 읽는 사람의 입장을 함께 고려해야 좋은 글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이 코스를 따라가며 사람들이 어떤 장면을 기억하길 바라나요?
시골 산책의 매력은 '잊었던 감각을 일깨우는 것'에 있다고 생각해요. 공기, 햇살, 풀내음··· 도시에서는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것들이, 이곳에서는 선명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빠른 속도로 가면 놓치는 게 많잖아요. 그 감각을 되찾고 온전한 나를 찾는 데 도와준다고 생각해요.이 산책 코스를 통해 기억되었으면 하는 것은, 큰 도로나 길 대신 일부러 골목길로 돌아섰을 때 예상하지 못한 장면을 마주치는 기쁨이에요. 예를 들어, 나무 옹이와 공생하는 작은 식물, 세상의 모든 여유를 누리는 고양이 한 마리, 600년 된 고목을 마주하며 느끼는 경이로움 같은 것들이요. 이런 감각의 발견은 내 안의 새로운 모습을 일깨워 주기 때문에, 이 지도도 그저 참고일 뿐, 오히려 길을 잃어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들이 이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 바라보았던 작은 것들, 그리고 그 순간의 기분이 오래 남았으면 좋겠어요. 결국 그런 것들이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를 주니까요.
또 하나는 따뜻한 인사입니다. 의령, 특히 칠곡은 주민 어르신들이 인사도 잘해주시고 정말 따뜻하세요. 조금 어색하더라도 이곳에서는 웃으며 인사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찰나이지만 느껴지는 따뜻함, 연결감, 그리고 여유를 통해, 바쁨을 잠시 내려놓고 '아, 내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구나'라는 감각을 경험하셨으면 해요.​​​​​​​
길을 따라가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길에서 벗어나는 용기. 어쩌면 그게 이 산책의 진짜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직접 다녀보고 글로 쓰는 과정이 어땠나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가볍게 써보자’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앉으니까 너무 어렵더라고요. 생각이 많은 스타일이다 보니,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분량도 채워야 하니까 더 부담이 됐어요.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글이라는 걸 의식하다 보니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왜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스트레스 받으려고 여기 온 건 아닌데…”라는 깨달음이 있었고, 그때부터는 조금씩 관점을 바꾸게 됐어요. ‘완벽하지 않아도 돼. 대신 내 의도가 솔직하게 전달되면 그걸로 충분해’라는 마음으로요. 그렇게 생각을 전환하니까 마음이 편해졌고, 글을 쓰는 손도 조금씩 풀리더라고요.​​​​​​​
특히 저는 생각은 많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았어요. 이번 작업은 그런 저에게 ‘글’이라는 도구를 통해 자기표현을 시도해본 첫 경험이었죠. 그냥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읽을 수 있게 다듬고, 문장을 고르고, 어떤 감정을 어떻게 전할지 고민하는 그 과정이 굉장히 낯설면서도 새로웠어요.
중간에 ‘이게 뭐 대단한 글도 아닌데 왜 이렇게 힘들까?’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고민들이 다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글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큰 배움이 아닐까 싶어요. 무엇보다 내가 그 공간에서 느꼈던 감정과 순간들을 되짚고, 다시 써 내려가는 과정 속에서 또다시 그 경험이 새롭게 살아나는 걸 느꼈거든요.​​​​​​​
이번 작업을 통해 저는 ‘완벽한 글’보다 ‘진정성 있는 글’이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걸 배웠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고 싶어졌어요. 단 한 사람에게라도 좋으니, 진심으로 닿을 수 있는 글을요
이 작업을 통해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점이 있다면?
저는 오랫동안 남에게 제 그림이나 글을 보여주는 걸 상당히 부끄러워하던 사람이었어요. 기준 없이 막연히 ‘잘 써야만 보여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솔직한 글이 잘 써지지 않더라고요. 남을 의식해서 쓴 글은 저 스스로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책을 쓰고 싶은 사람이 글을 못 보여주다니 모순이죠.
하지만 이번 작업을 하면서 그런 마음이 조금씩 달라졌어요. 결과물을 낼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어쩔 수 없이 행동해야 했던 것도 있고요(하하). 그래서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지금의 나를 솔직하게 표현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에겐 제 진심이 닿을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완벽주의에서 벗어나 ‘조금 부족하면 어때’ 하는 여유도 생겼고요. 그렇게 마음을 바꾸고 나니까 글도 훨씬 편하게 써지더라고요.​​​​​​​
이 지도가 완성되면 누군가는 보겠죠. 이제는 생각이 기록으로 남아 계속 이어지게 되었어요.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 기준은 ‘누군가에게 단 한 가지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데, 지도가 완성되면 홍의별곡의 자산이 되는 거니까 그 기준만 놓고 보면 이미 성공한 셈이에요.
이제는 제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눌 수 있음에, 부끄러움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먼저 떠올라요. 그리고 그게 이번 여정에서 가장 큰 변화이자, 제 안의 회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의령군  홍의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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